소매치기가 방사능 폐기물에 노출된 뒤 초능력을 얻는다는 설정. 처음 이 한 줄만 읽었을 때 솔직히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보고 나니 생각보다 훨씬 진지하게 '영웅이 된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놀랐습니다. 할리우드식 히어로물에 질려 뭔가 다른 걸 찾는 분들이라면, 이 영화가 하나의 출구가 될 수 있습니다.
## 히어로 서사: 능력이 아니라 책임감이 영웅을 만든다
이탈리아 영화 <그레이트 지로>(원제: Lo chiamavano Jeeg Robot)는 2015년 개봉한 SF 히어로 장르입니다. 여기서 SF 히어로 장르란 초자연적 능력을 가진 개인이 현실 사회 속 갈등과 충돌하는 구조를 가진 서사 형식을 의미합니다. 헐리우드식으로 치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틀이지만, 이 영화는 그 문법을 완전히 비틀어 로마 외곽의 음침한 뒷골목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주인공 엔조는 경찰을 피해 테베레 강에 뛰어들다 방사능 폐기물 드럼통을 건드립니다. 다음 날 멀쩡히 회복한 것도 모자라, 이후 총에 맞고 건물에서 추락해도 살아남는 재생 능력과 괴력을 갖게 됩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흥미로웠던 건 이 능력을 얻은 직후 엔조가 보이는 반응이었습니다. 세상을 구하겠다는 의지 같은 건 전혀 없고, 그저 좀 더 편하게 강도질을 하려는 생각뿐입니다. 능력 자체보다 그 능력을 어떻게 쓰느냐가 인물의 본질을 드러낸다는 걸 이 장면에서 분명히 느꼈습니다.
변화의 계기는 알레시아라는 여성입니다. 아버지 세르조가 장물아비로 활동하는 집안에서 자란 알레시아는 정신질환으로 인해 현실과 고전 로봇 애니메이션 <강철 지그>의 세계를 혼동하는 캐릭터입니다. 그녀는 엔조에게서 애니메이션 속 히어로의 모습을 봅니다. 이 지점이 이 영화의 핵심 서사 장치(내러티브 디바이스)입니다. 내러티브 디바이스란 캐릭터나 사건을 통해 이야기의 방향과 주제 의식을 이끌어가는 장치를 뜻합니다. 알레시아는 엔조가 영웅이 되도록 이끄는 촉매 역할을 합니다.
제가 이 서사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엔조가 영웅으로 각성하는 순간이 화려한 전투 장면이 아니라 알레시아를 잃은 후의 묵직한 침묵 속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영웅이 된다는 것은 선천적 재능이 아니라, 지키고 싶은 존재가 생겼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는 메시지가 정말 오래 남았습니다.
영화의 히어로 서사 구조에서 눈에 띄는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주인공의 능력 획득이 우연한 산업재해(방사능 폐기물 노출)에서 비롯됨
- 능력 획득 후에도 도덕적 각성 없이 범죄자로 행동하는 현실적 묘사
- 악당 진가로도 동일한 방식으로 능력을 획득해 대립 구도를 형성
- 히어로 정체성이 사랑과 상실을 경험한 이후에야 완성됨
이는 영웅 서사의 전형적 구조인 영웅의 여정(Hero's Journey)과 맞닿아 있습니다. 영웅의 여정이란 조지프 캠벨이 정리한 서사 구조로, 평범한 개인이 위기와 상실을 거쳐 진정한 영웅으로 완성되는 보편적 이야기 패턴을 가리킵니다([출처: 조지프 캠벨 재단](https://www.jcf.org)). 이 영화는 그 패턴을 이탈리아 느와르의 언어로 재해석했다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 알레시아와 다크히어로: 신선함과 한계가 공존하는 지점
알레시아 캐릭터는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논쟁 지점입니다. 저도 보는 내내 이 캐릭터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녀가 엔조를 변화시키는 서사적 기능을 충실히 해낸다는 점에서 설득력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질환을 가진 여성을 남성 주인공의 성장을 위한 소재로만 사용한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습니다.
이는 영화 서사학에서 말하는 '여성 냉장고(Women in Refrigerators)' 트로프와 연결됩니다. 이 트로프란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의 감정적 각성이나 복수를 유발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소비되는 서사 패턴을 말합니다. 알레시아는 후반부에 진가로의 적대 조직의 총격에 희생되고, 그 죽음이 엔조의 최종 결단을 이끌어내는 구조로 이어집니다. 제 경험상 이런 구도는 여성 인물에게 독립적인 서사 동기가 부여되지 않을 때 특히 불편하게 느껴지는데, 이 영화가 바로 그 경계선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잃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다크히어로물로서 갖는 가치는 분명합니다. 다크히어로(Dark Hero)란 전통적인 영웅상과 달리 도덕적 회색지대에 위치하며 폭력이나 범죄와 타협하면서도 결국 선한 목적을 추구하는 캐릭터 유형을 가리킵니다. 엔조는 끝까지 완전히 정화된 인물이 되지 않습니다. 그 미완성의 느낌이 오히려 현실적이고 인간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저예산 영화의 한계도 솔직히 언급해야 할 것 같습니다. 후반부 액션 시퀀스에서 시각 효과(VFX) 완성도가 눈에 띄게 떨어집니다. VFX란 Visual Effects의 약자로, 컴퓨터 그래픽 등 디지털 기술로 실제 촬영이 불가능한 장면을 구현하는 기술을 뜻합니다. 예산의 한계가 클라이맥스의 몰입도를 일정 부분 떨어뜨린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약점을 감수하고도 볼 만한 이유는, 이 영화가 스펙터클보다 인간의 내면 변화에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럽 영화 전반의 흐름을 보면, 이탈리아 영화 산업은 2010년대 이후 장르 영화의 실험적 시도를 꾸준히 이어오고 있습니다([출처: 이탈리아 영화 진흥청 Cinecittà](https://www.cinecittaluce.it)). <그레이트 지로>는 그 흐름 속에서 이탈리아 특유의 네오리얼리즘 전통, 즉 화려하지 않은 현실의 무게를 그대로 담는 방식을 히어로 장르에 접목했다는 점에서 평단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할리우드의 전형적인 히어로 영화에 익숙하다면 처음에는 이 영화의 거친 톤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폭력과 범죄의 묘사 수위가 상당히 높고, 전반부는 특히 불쾌한 장면이 반복됩니다. 하지만 그 불쾌함을 감수하고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결말에서 엔조가 폭탄을 안고 강물로 뛰어드는 장면이 생각보다 훨씬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제가 직접 보고 느낀 건, 이 영화는 영웅이 되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린 게 아니라 영웅이 되는 것이 얼마나 많은 것을 잃은 뒤에야 가능한지를 담담하게 보여준다는 점이었습니다.
뻔한 권선징악 구조에 지쳐 있다면, 그리고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 영화는 충분히 킬링타임 이상의 경험을 줄 것입니다. 완벽한 영화는 아닙니다만, 오래 기억에 남는 영화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비슷한 결의 다크히어로물을 찾는 분들이라면 이 작품을 목록 상단에 올려두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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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T-U2DMQYI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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